“이 법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 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한다.
‘(국가보안법 제 1조)’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 확보”를 목적으로 한 국가보안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제정 당시부터 격렬한 찬반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자유 확보”보다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나라 안팎의 비판에 직면해 있다.

국가보안법은 제정된 이래 현재까지 일곱 차례 개정됐다.
이 법이 제정된 당시는 식민지를 갓 벗어난 상태로 극단적인 좌우대립이 심했고, 건국 당시 비상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한시적’인 목적으로
제정됐다. 제정 국가보안법은 모두 6개 조문에 불과했으며, 특히 반국가단체를 조직하거나 가입하는 행위를 직접적인 처벌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란상태가 끝나고 좌익관련 조직이 거의 궤멸된 이후에도 국가보안법은 일곱 차례의 개정을 통해 더욱 강화됐다.
<국제연합 조선위원단>의 보고에 의하면 이 국가보안법의 시행에 의해 1949년 한 해 동안만도 11만 8621명이 검거·투옥되었고, 같은해
9~10월에 132개 정당·사회단체가 해체되었다 한다. 그러나 실제 국가보안법 제정 시기 적용사건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정부의 통계는 1961년 이후부터 나타나는데(「사법연감」, 법원행정처 발간),
1961년부터 2002년까지 최소한 1만 3178명이 국가보안법(반공법 포함) 위반으로 기소, 재판에 회부되었다. <표1>

이 도표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은 반공법이 제정된 1961년부터 폐지(국가보안법에 흡수 통합됨)된 1980년까지는
국가보안법보다 반공법이 평균 두 배 이상 더 많이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반공법 제4조(찬양·고무)의 남용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반공법 제 4조는 당시 국가보안법에는 없던 조항으로써 찬양·고무·동조행위가 어떤 목적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다만 반국가단체에
이로운 결과만 초래하면 처벌할 수 있었다. 따라서 술자리에서의 사소한 농담, 경찰관과의 다툼에서 생긴 언동 등에 대해서도
“북한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한다는 이유로 구속당하는 사례가 빚어졌다. 이로 인해 “막걸리 반공법”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또한 국가보안법의 적용인원이 증가된 시기를 살펴보면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969년 삼선개헌과 1971년 대통령선거, 1972년 유신헌법 제정시기가 그러했다.
한편 1980년 12월 30일 국가보위입법회의는 반공법을 폐지하고,
국가보안법을 전면 개정(6차 개정)했다. 이를 통해 반공법상 찬양·고무 조항 등은 개정 국가보안법에 흡수되었으며 각 조항별 형량은 상향 조정되었고, 처벌 범위도 또한 확대됐다. 따라서 1980년대는
‘국가보안법 시대’라고 불릴 만큼 국가보안법의 적용이 잦았다.

이 통계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국가보안법 적용인원의 급증시기가 공안수사기구의 확대시기와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다.
가령, 5공화국 중반기인 1985년의 기소자는 176명인데 반해 1986년 318명, 1987년 432명으로 두 배 가량 증가했다.
그런데 1986년은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부가 두 차례에 걸친 조직개편을 통해 대공 부서를 수사6과까지 확대한 시기와 일치한다.
검찰 역시 1986년 대검찰청 공안부에 공안3과와 4과를 확대 증설하였다. 또한 1989년과 1990년의 수치가 급증하고 있는데, 이는
1989년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을 계기로 설치한 공안합동수사본부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기간 동안 가장 높은 수치를 나타낸 1997년 국가보안법 구속기소자 급증현상은 바로 1996년 보안역량 강화 계획에 따른
경찰의 보안수사대 증설과 대검 공안부가 주도한 한총련좌익합동수사본부 설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국가보안법 위반자 가운데는 국가보안법 7조(찬양·고무) 위반으로 인한 구속 비율이 점차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김영삼 정부에서 7조 위반 구속자는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자의 90.1%인 1791명으로
조사되었고, 김대중 정부에서는 국가보안법 구속자의 91.8%가 7조에 의한 구속자로 조사되었다. 반공법에 뿌리를 둔 7조는 법 자체의 모호성과 그로 인한 적용기관의 자의적인 법 적용 가능성 등으로 국가보안법의 남용시비를 불러일으키는 근원이 되어 왔다. 유엔인권위원회, 유엔인권이사회 등 국제사회에서도 거듭하여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권고하고 있다. 이처럼 7조에 대한 적용 비율이 점차 높아 가는 현상은 국가보안법이 국가 안보보다 정부 비판세력을 겨냥한 법이라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국가보안법이 적용된 사례를 살펴보면 장관, 국회의원, 대학총장, 공안검사를 비롯해 노동자와 일반 서민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이 법에 의해 처벌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변호사의 변론, 신문기사, 그림, 영화, 소설, 심지어는 취중농담까지 이 법에 의해 단죄되었다.

국가보안법은 법 제정 이후부터 현재까지 적용과정에서 영장 없는 불법체포 및 구금, 고문수사, 사형과 의문사, 장기구금 등 신체의 자유를
침해해 왔다는 시비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는 1990년대 이후 점차 개선되기도 하였지만 체포, 연행과정에서의 인권침해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표2> “1980년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불법구금 사례”는 그 심각성의 일단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인신구속을
통제하기 위한 영장주의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들에서는 종종 예외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불법구금은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구속
기소할 물적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자백을 손쉽게 받아 내기 위한 목적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변호인의 접견교통권 등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밀실에서 장기간 억류를 통해 고문 등 강압적인 수사가 이뤄지기도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고문수사 관행은 사법부가 고문수사에 의한 거짓자백이라는 피고인의 호소는 무시한 채 “자백”을 유죄의 증거로 채택한 점, 고문 논란에 대한 진상 규명이 이뤄지지 않았던 점,
수사기관 종사자들의 인권의식의 부재 등으로 인해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국가보안법 사건에서는 일반 형사사건에 비해 사형과 무기 등 중형 선고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번 조사 결과 1968년부터 1990년까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사건의 1심 사형선고 인원은 122명으로 같은 기간 전체
사형선고 인원 593명의 20.6%를 차지했다. <표3 - 참조>

*출처 : 법원행정처, 「사법연감」, 1969~1991년


특히 대법원 선고 다음날 8명이 사형당한 1972년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은 이 법의 잔혹성을 그대로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이다.
그 외에도 1973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가 사망한 최종길 교수, 1989년 조선대 교지 편집장 이철규의 죽음까지 각종 의문사가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국가보안법 수감자에 대한 강제 전향 공작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 또는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이 70여 명에
이른다는 증언도 있다. 또한 국가보안법 위반 수형자 가운데는 장기구금 복역자가 다수 발생하였는데, 30년 이상 복역한 장기수만도
33명으로 조사되었다.

국가보안법 적용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는 국가보안법 관련 당사자가
당하는 피해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시민적 인권에 앞서 국가 안보를
더 우선시 해 왔던 “국가보안법 현상”을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켰다는 점이다.
이는 또한 법률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이데올로기적 현상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전 국민적인 자기검열 통제 시스템으로 정착되면서 결국 양심·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의 개폐 문제는
무엇보다 국가안보 논리에 의해 무시당하고, 침해당해 온 “인권”을 바로
세우는 일인 것이다.

 

 

 
Copyleft 1985-2004,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MINKAHYUP | minka21@hanmail.net
서울 종로구 명륜3가 108-3 1층 | TEL 02-763-2606 | FAX 02-745-5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