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은 1985년 12월 12일 창립되었다.
민가협이 창립되던 1985년은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수많은 청년·학생, 노동자,
민주인사들이 구금되어 있었고, 안기부 등 수사기관, 교도소에서 고문 등
인권유린이 심각했기에 이러한 인권침해와 맞서 싸우고 양심수들을 구조하기 위해
가족들의 모임이 만들어진 것이다.

민가협의 뿌리는 유신독재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구속자가족 협의회’를 모태로 1976년 양심범가족협의회의
전통을 이어 남민전 사건, 재일교포간첩단 사건 등 유신독재시절부터 정치적
박해를 받고 있던 가족들과 1985년 미문화원 사건, 민정당 연수원 점거농성 사건
등 민주화를 요구하다 구속된 수많은 학생들의 가족들이 모여 ‘민가협’이라는
조직을 만들게 되었다.


주로 양심수의 어머니들로 구성되어있는 민가협은 구속자의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인권지킴이’로 민주주의와
인권실현을 위해 싸워왔다. 민가협 어머니들이 그동안 벌여온 활동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점은 인권이 침해되는 그 어떤
곳이라도 맨 먼저 달려가 긴급구조 활동을 벌이는 ‘인권 앰블런스’ 역할을 해온 점이다.
민주화를 위한 집회, 농성, 시위 현장의 맨 앞에서 싸웠으며, 시위도중 전투경찰에 끌려가는 학생들을 맨몸으로 구출하는
사람들이 바로 민가협 어머니들이었다. 교도소에서 재소자에 대한 인권침해 사건이 발생하면 교도소 앞 노상에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으며, 안기부, 경찰 등 수사기관에서 고문등 가혹행위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맨 먼저 달려가 이의 중단과
책임자의 사과와 재발방지를 촉구하는 농성을 하는 일이 잦았다. 또한 시국사건 재판 때마다 재판을 방청하며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한 사법부를 향해 질타를 하는 등 이 사회에서 관행처럼 벌어지곤 했던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를
규탄하고 근절하기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인권 119’였던 민가협 회원들이 구속되기도
하였으며, 경찰차에 실려 어디론가 버려지기도 하고 전경들에게 많이 맞기도 하는 등 수년씩 민가협 활동을 한 어머니들은
대개가 몸 성한 데가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민가협의 노력은 그동안 무소불휘의 성역으로 알려졌던 안기부, 대공분실,
교도소 등의 인권침해 행위를 상당부분 근절하는 성과를 낳았다.


민가협은 창립부터 지금까지 양심수 석방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양심수 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널리 알린 것도 민가협이었으며, ‘양심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석방에 인색했던 정부를 강하게 규탄하고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양심수를 사회문제화 시켜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양심수들이 감옥문을
열고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그러한 활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사진 1장 없이 연고자도 없이,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그 무엇 하나 없이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묻혀있던 3, 40년 구금되어 있던 초장기수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사회에 복원시켜 내면서 이들을 전원 석방하는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1995년에는 세계최장기수 김선명 석방 캠페인 등을 비롯해 국제사면위원회 등
세계적인 인권단체와의 연대활동을 벌여온 결과 김선명 등 세계최장기수들이
석방되었다. 그후에도 여전히 갇혀있는 비전향장기수들의 석방을 촉구하기 위해
해마다 8월이면 명동성당에서 ‘갇힘의 시위’인 하루감옥체험 행사를 전개해왔다.
0.75평의 실제 크기의 모형감옥 안에서의 하루감옥체험에는 수많은 예술인, 영화배우,
교수, 종교인, 방송인, 시인, 만화가 등 사회인사들의 참여를 이끌어냈으며 그리하여
1999년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모든 비전향장기수들이 풀려났다. 또한 이인모 노인
고향가기 운동을 벌여 1993년 3월 18일 북녘 고향 가족 품으로 돌아가게 하였고,
여러 인권단체들과 함께 1999년 12월 ‘비전향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를 결성,
활동을 벌인 결과 2000년 9월 3일 마침내 63명의 비전향장기수가 북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89년 2월 21일 민가협은 고문경관 이근안을 국민들이 직접 검거하자고 국민수사를 선언하며 현상수배를 하였다.
검거 의지가 없는 권력을 향한 포고였으며 고문근절을 위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후 10년 동안 끊임없이 ‘고문경찰 이근안’의 처벌을 위해 노력해온 결과 1999년 10월 마침내 이근안이 자수하여
구속되었다. 이근안 처벌운동은 반인도적 범죄행위인 고문 근절 및 재발방지를 막기 위한 운동이었으며, 이로 인해
고문 문제가 사회이슈화 되었다.

민가협은 또한 5,6공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조작된 간첩사건의 실태를 밝히고 이들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하여
조작간첩 사건 사례보고서를 작성하고, 전국 순회 사례발표회, 재심청구 운동 등 지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2005년 7월, 이근안에 의한 고문으로 간첩으로 조작된 함주명씨가 재심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국가보안법, 사회안전법, 보안관찰법 등 민주주의와 인권에 역행하는 대표적인 악법철폐를 위해 쉼 없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사회안전법(1989년), 전향제도(1998년), 준법서약서(2003년)가 폐지되기도 했다. 특히 국정원(안기부),
경찰 대공분실, 검찰 공안부, 공안문제연구소(경찰대학 산하기구) 등 공안수사기구에 대한 감시활동과 문제제기를
해왔으며 이러한 활동은 2004년 7월, 공안문제연구소 폐지를 이끌어내는 밑바탕이 되었다.

민가협은 인권이슈를 사회공론화하기 위하여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공연, 하루감옥체험, 시민가요제,
인권콘서트, 인권만화전, 인권영화 제작 등 새로운 문화예술적 양식을 개발하고, 우리사회 여론 주도층의 다양한
참여를 유도 하는 등 대중적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93년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서고도 양심수와 국가보안법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김영삼 정부 하에서 새로운 인권침해가 이어지자 93년 9월부터
매주 목요일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목요집회’를 시작했다.
목요집회는 600회를 바라보기까지 양심수?, 국가보안법 문제를 비롯한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뿐 아니라 우리사회 다양한 약자, 소수자들의 인권현안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해결을 촉구하는 ‘인권신문고’가 되고자 했다. 또한 목요집회는
국제연대집회, 거리음악제, 퍼포먼스, 다양한 상징과 이미지를 활용한 선전 등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거듭해 왔다.

민가협은 경찰 국정원(안기부) 등 수사기관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 사건을 긴급히
조사하여 긴급구조 활동을 벌이거나, 인권침해를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특히 정기적 양심수 현황 조사는 “양심수는 없다”며 양심수
문제를 은폐시키려는 정권의 부도덕성을 질타하고 양심수의 실태를 정확히 조사하여
이를 통계화 시켜냄으로써 석방운동의 기초를 다졌다. 또한 민간단체라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국가보안법과 관련한 갖가지 통계를 정리, 발표함으로써 정부로 하여금
국가보안법 실태를 정확히 공개토록 하는데 일조하였다. 해마다 구체적인 사례를
조사, 연구하여 발표한 국가보안법 실태보고서는 국가보안법에 의한 인권침해
실상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해왔다.
최근 민가협은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인권의식의 확산을 기하기 위한 활동을
벌여오고 있다. 양심수 석방,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비민주적인 법제도 개선운동,
테러방지법 제정 반대 운동을 통한 비밀정보기구 개혁 촉구 운동은 물론이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권의 문제로 인정할 것과 대체복무제 도입운동,
보안관찰법 폐지운동, 성적소수자 등 소수자들의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인권문제를 사회 의제화 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인권개선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민가협 어머니들의
‘보랏빛 수건’의 행진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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